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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왕조 제 10대 왕 연산군 묘

낭만 시니어 2022. 12. 5.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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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도봉구 방학동 산77 에 있는 연산군 묘는 다른 조선 왕릉처럼 웅장한 모습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주택가와 차도 사이 한켠에 외롭게 있으며 다른 왕릉과는 다르게 입장료를 받지 않는다.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동절기는 오후 5시)까지 무료 개방하고 매주 월요일은 휴무다.
묘 입구 정문 옆에 있는 콘테이너 박스가 묘 관리 사무실로 감독 관리자가 상주하고 있다.

왕실 묘역길 입구(우이역에서 도보 12분 정도 소요)

역대 조선왕조 임금들의 왕릉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으나 '릉'이 아닌 '묘' 지위를 가지고 있는 연산군 묘는 세계문화유산에 포함되지 못했다.

연산군 묘는 1991년에 사적 제 362호로 지정되었으며 지정 면적은 1만 4,300 ㎡로 공식적인 명칭은 '서울 연산군 묘'라고 한다.
1506년 유배지인 강화도에서 죽은 연산군은 그곳에서 장사를 지냈다가 1512년 (중종 7년)에 연산군의 왕비였던 거창군부인 신씨(1494년 연산군 왕비로 봉해졌다가 1506년 연산군과 함께 폐출되어 부인으로 강봉되었다)가  중종에게 상소를 올려 현재의 자리로 묘를 옮겼다.

연산군 묘 재실

연산군은 1476년(성종 25년)에 성종과 두번째 왕비였던 폐비 윤씨 사이에서 태어나 1506년(연산군 12년)에 사망했다.
성종의 첫째 아들로 태어나 1483년(성종 14년)에 어린 나이인 8세에 세자로 책봉되었다.
1494년(성종 25년)에 성종이 죽자 19세의 나이에 왕위에 올랐으며 수렴청정은 하지 않고 혼자서 직접했다.

연산군 묘 정문 앞 은행나무
연산군 묘 정문 앞 표지석과 안내판
연산군 묘 정문 입구와 관리 사무실

연산군은 갑자사화 이후 더욱 더 난폭해지고 방탕한 생활로 백성들의 삶이 피폐해지자 연산군의 폭정에 지친 대신들이 반란을 일으켜 연산군을 몰아내고 이복 동생인 진성대군을 왕위에 앉혔는데 이것이 중종반정(1506년, 연산군 12년)이다.

연산군을 폐출 한 중종반정은 신하들이 왕을 몰아 낸 최초의 사건으로 조선 역사에서 왕위 계승서열을 무시하고 직접 왕위를 찬탈한 태종(조선 3대 왕)과 세조(조선 7대 왕)의 경우와는 다르다.

연산군은 머리도 좋았고 시도 잘 지었는데 어려서 부터 난폭한 행동을 자주 해 신하들의 신임을 잃었다고 한다.
조선시대 4대 사화인 무오사화(1498년, 연산군 4년), 갑자사화(1504년, 연산군 10년), 기묘사화(1519년, 중종 14년), 을사사화(1545년, 명종 즉위)중에서 연산군이 폭군으로 변하기 시작 한 갑자사화는 연산군 어머니인 폐비 윤씨의 죽음과 관련 된 사화로 권력투쟁에 연루되어 불행을 자초했다.

반정으로 왕위에 오른 이복동생인 중종은 폐위 된 연산군을 죽이지 말도록 신하들에게 명해 강화도로 유배되었다가 그해 11월 병으로 시름시름 앓다가 31세의 나이에 죽었다.
왕에서 폐위 된 연산군은 왕의 묘호인 '릉'을 받지 못하고 '묘'라 했다.

연산군과 거창군부인 신씨 묘

왕위에 오를 때까지 생모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알지 못하고 성종의 세번째 왕비인 정현왕후(진성대군였던 중종의 어머니) 밑에서 자랐는데 세자였던 연산군과 계모인 정현왕후 사이에는 특별한 정이 없었다.
아버지인 성종 또한 제왕으로서의 자질이 부족하다고 생각되는 세자를 미덥지 않게 여겼다고 한다.
할머니인 인수대비도 폐비 윤씨를 쫓아낸 장본인으로 폐비 윤씨의 아들인 연산군이 어릴 때부터 탐탁치 않게 생각해 손자에 대한 정을 주지 않았다고 한다.

연산군과 거창군부인 신씨 묘

갑자사화 때 연산군은 궁에서 쫓겨나 사가에 나가있던 폐비 윤씨를 모함해 사약을 받게 한 성종의 후궁이었던 정귀인과 엄소용을 때려서 죽였고 그들의 아들인 안양군과 봉안군도 죽였다.
며느리인 폐비 윤씨를 모함해 사약을 받게 하는데 앞장서서 일조했던 인수대비도 정귀인, 엄소용, 안양군, 봉안군 등의 죽임에 충격을 받고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겨울철에 접어 들며 쌀쌀한 날씨에 바람도 간간히 불어대는 평일에 찾아 간 연산군 묘는 북한산 둘레길 20구간인 왕실묘역길 중간에 위치해 있고 주택가와 차도가 인접해 있으면서도 찾는 이들이 별로 없어 날씨만큼이나 스산했다.
어릴 때부터 가족들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하며 삐뚤어진 성격을 왕이 된 후에는 어머니에 대한 잘못 된 복수심으로 폭정을 일삼으며 민심을 잃고 그 민심에 의해 폐위 된 연산군의 안타까운 일생을 보는듯한 풍경이었다.

출처 : 카카오맵 화면캡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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