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행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라면(설악산 대청봉 등산)

낭만 시니어 2022. 10. 5. 15:35
728x90

2015년 가을에 설악산 대청봉 일출을 보기 위해 새벽에 설악산에 올랐었다.

전국에 있는 수많은 산악회에 정식회원으로 가입은 안 했는데 산악회에서 단체로 출발하는 산행에 왕복 교통비만 내고 동행한 적이 몇 번 있었다.

주로 내 차를 이용해서 아내와 같이 목적지로 이동해서 산행하는 경우가 많다.

설악산 대청봉에서 바라본 속초앞바다 일출

7시쯤 저녁밥을 먹고 등산에 필요한 장비와 먹거리를 챙겨서 밤 9시 조금 지나 집에서 출발해 집결지인 강남 신사역으로 행했다.

11시 출발 예정이라 여유 있게 출발한 덕분에 이른 시간에 도착했다.

집결지에 도착해 예약자 이름 확인하고 관광버스에 올라 중간자리에 앉았다.

설악산 대청봉에서 바라본 속초앞바다 일출

요즘은 대형버스라도 28인승이라 차내 좌석 간 공간이 넓고 예약한 순서대로 자리도 지정되어 편안하게 앉아 갈 수 있다.

당시에는 45인승이라 좌석 간 공간도 좁고 자리도 지정되지 않아 집결지에 도착하는 순서대로 자기가 원하는 자리에 선택적으로 앉을 수 있었다.

설악산 대청봉에서 바라본 속초앞바다 일출

늦게 도착하면 가장 뒷자리인 버스 엔진 룸 위에 있는 자리에 앉아서 엔진소음 속에서 오랜 시간 견뎌야 했다.

경험자들은 조금이라도 편한 자리를 차지하려고 집결지에 일찌감치 도착해서 타고 갈 버스를 기다렸다가 원하는 자리에 앉는다.

설악산 대청봉에서 바라본 속초앞바다 일출

한 대의 버스 안에는 부부 또는 친구 등 1~2명이 보통이었는데 여럿이 모여서 같이 가는 팀도 종종 있다.

그들 중에는 일행이 다 도착도 안 했는데 일행의 숫자대로 자리를 먼저 다 잡아 놓는 바람에 때로는 출발도 하기 전에 자리다툼으로 인한 언쟁이 벌어져 얼굴을 붉히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설악산 대청봉에서 보이는 울산바위

11시에 서울에서 출발하면 거의 모든 사람은 곧바로 잠이 들고 버스는 목적지를 향해 밤새 달려간다.

서울에서 밤 11시에 출발해 다음 날 새벽 2시경에 강원도 설악산 오색 약수터 주차장에 도착해서 각자 산행에 필요한 장비를 점검하고 몸풀기도 하면서 새벽 3시에 등산로 출입문이 열리기를 기다린다.

설악산 대청봉에서 보이는 공룡능선

전국 각지에서 출발해 도착한 30여 대의 버스에서 내린 수백여 명의 등산객들이 등산로 출입문 앞에서 기다리다가 문이 열리자 마다 서둘러 출발을 한다.

나처럼 대청봉 일출을 보기 위한 목적으로 온 사람들은 출입문 바로 앞에서 기다리다가 선두그룹에 서서 등산을 시작한다.

설악산 대청봉 정상에서 인증샷

여러 차례 설악산에 다녀가서 이미 일출을 본 사람들은 천천히 뒤에서 출발하는데 올라가는 중간에 뒤돌아 보면 아주 장관을 이룬다.

깜깜한 새벽 시간에 각자 머리에 쓴 헤드램프 불빛만 줄지어서 꾸불꾸불한 등산로를 따라 올라오는 모습이 마치 용이 꿈틀대는 듯이 아주 볼만 하다.

이른 새벽 시간에 산에 오르는 사람만이 볼 수 있는 특권인 것이다.

비선대 쪽 단풍

출입문에서 출발해서 한 시간 정도 지나면 선두 그룹에서도 뒤처지는 사람들이 많아져서 등산객들 간의 거리도 조금씩 멀어진다.

오색 약수터 출입문에서 대청봉까지 등산로는 빠른 걸음으로도 3시간 반 정도 소요된다.

함께 온 일행들과 맞춰서 오르면 4시간 이상 소요되는 쉽지 않은 등산로다.

천불동 계곡쪽으로 하산 중 찍은 안내판

우리가 등산한 날 속초 앞바다 수평선에서 해가 떠오르는 시간이 6시 반경이라 그 시간에 맞추느라 아내와 가쁜 숨을 내쉬며 쉬지 않고 올라갔다.

아내와 같이 칠부 능선 정도까지 갔는데 아내가 힘들다고 나보고 먼저 가서 사진 찍으라고 해서 숨이 턱에 찰 정도로 바쁘게 올라갔다.

대청봉에서 천불동 계곡으로 하산하는 길에 찍은 풍경들

가쁜 숨을 몰아쉬며 대청봉에 올라서니 때 맞추어 붉은 해가 저 멀리 수평선에 머리를 내밀려고 바다 전체를 붉게 물들이기 시작했다.

일출을 보기 위해 여러 차례 산에 올라가도 날씨가 흐리거나 안개가 많이 끼면 볼 수가 없는데 다행히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날씨가 도와주신 덕분에 일출을 감상할 기회를 포착한 것이다.

아내를 기다리며 정신없이 사진을 찍고 있는데 아내도 힘들게 도착을 해서 둘이 손잡고 서서 설악산 최고봉인 대청봉(해발 1,708m)에서 일출을 감상했다.

대청봉에서 천불동 계곡으로 하산하는 길에 찍은 풍경들

해가 수평선 위로 완전히 오르고 난 다음에 아내와 여유롭게 대청봉과 표지석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고 있는데 하나둘 늦게 도착한 사람들로 인해 대청봉 주변은 잠깐 사이에 발 디딜 틈도 없이 혼란스럽기 조차했다.

설악산 대청봉 표지석을 배경으로 인증 사진을 찍으려고 기다리는 사람들의 줄이 점점 길어졌다.

수백여 명의 등산객들이 한정된 장소에 모이다 보니 모든 것이 경쟁이었다.

일출도 감상했고 일찌감치 인증 사진도 찍었으니 아침밥을 먹기 위해 아내와 서둘러 중청봉에 있는 대피소로 발길을 향했다.

대청봉에서 천불동 계곡으로 하산하는 길에 찍은 풍경들

중청봉 대피소 옆 빈자리에 등산용 깔판을 깔고 배낭 속에서 밥과 반찬을 꺼내려고 하는데 이런 황당하고 난감한 상황이 일어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밥통만 덩그러니 있고 반찬 통을 아무리 찾아봐도 보이질 않았다.

어젯밤에 반찬을 담아놓고 잠깐 냉장고에 넣어놓는다는 것이 출발할 때 깜박 잊어버리고 안 넣고 온 것이다.

대청봉에서 천불동 계곡으로 하산하는 길에 찍은 풍경들

저녁밥을 일찍 먹고 새벽에 3시간 넘게 등산을 했으니 뱃속은 텅 비어 밥 달라고 아우성이고 반찬은 아무것도 없고 아주 난감했다.

옆에 있던 등산객이

중청대피소 매점에 가시면 라면을 팔아요.”라고 했다.

이보다 반가울 수가 없어서 정신없이 대피소에 갔는데 이번에도 난감한 상황이 또 벌어졌다.

대청봉에서 천불동 계곡으로 하산하는 길에 찍은 풍경들

대피소에서는 컵라면을 파는 게 아니라 봉지 라면만 팔고 있었다.

우리는 등산 다니며 집에서 밥과 반찬을 가지고 다녔기 때문에 등산용 버너와 코펠이 없었다.

설악산 꼭대기 중청봉에서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대책이 없었다.

봉지에 든 라면을 끓일 수가 없으니 완전히 그림의 떡이었다.

대청봉에서 천불동 계곡으로 하산하는 길에 찍은 풍경들

옆자리에 앉은 등산객 일행은 벌써 버너로 찌개를 끓여서 밥을 먹고 있으면서 후식으로 커피를 마시기 위해 코펠에 물을 끓이고 있었다.

아내가 실례를 무릅쓰고 옆에 등산객들한테 우리 사정을 설명했다.

그랬더니

버너와 코펠을 빌려 드릴 수 있으니까 대피소 가셔서 봉지 라면 사 오세요.”라고 했다.

대청봉에서 천불동 계곡으로 하산하는 길에 찍은 풍경들

고맙다는 인사를 수도 없이 하면서 부지런히 뛰어가 봉지라면을 사다가 끓여서 먹는데 이보다 더 맛있고 행복한 순간을 어디 가서 두 번 다시 느낄 수 있을까 싶었다.

세상 어느 곳에 이보다 더 훌륭한 장소에 맛있는 라면이 있을까 했다.

내 인생 두 번 다시 맛볼 수 없는 최고의 라면이었다.

대청봉에서 천불동 계곡으로 하산하는 길에 찍은 풍경들

어제 저녁밥을 7시쯤 먹었고 오늘 새벽에 3시간 반 넘는 시간 동안 등산을 한 후 12시간도 더 지난 시간에 밥을 먹었으니 시장이 반찬이라고 무엇을 먹었어도 꿀맛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황당한 경험을 한 후에 먹은 라면 맛은 두고두고 잊지 못할 환상적인 최고의 맛이었다.

대청봉에서 천불동 계곡으로 하산하는 길에 찍은 풍경들

순식간에 라면을 다 먹고 남아있던 라면 국물에 가지고 간 밥까지 말아서 먹고 나니 그때 서야 세상이 환하게 제대로 보였다.

휴지로나마 코펠을 닦아서 되돌려 드리며 감사 인사를 수도 없이 또 했다.

고마운 분들 덕분에 이 세상에서 최고로 맛있는 라면을 먹었다.

대청봉에서 천불동 계곡으로 하산하는 길에 찍은 풍경들

빈속을 든든히 채운 다음 천천히 주변 경치도 감상하면서 오색 약수 반대편인 천불동 계곡을 지나 내설악 쪽으로 7시간 걸려 하산을 했다.

오후 2시경 내설악에 있는 식당가에 도착해서 점심으로 산채비빔밥을 먹은 다음 집결지인 내설악 주차장으로 갔다.

하산 완료 후 설악동 탐방지원센터에서 보이는 풍경

버스는 오후 3시 반에 서울에서 같이 간 일행들을 태우고 내설악 주차장을 출발해 서울로 향했다.

서울로 올라오는 고속도로가 많이 막히는 바람에 밤 10시가 넘어서 집에 도착해 냉장고 문을 열어보니 곱게 싸놓은 반찬 통이 자기 혼자 놔두고 갔다고 뾰로통한 모습으로 있었다.

하산 완료 후 설악동 탐방지원센터에서 보이는 풍경

장장 11시간 동안 대청봉을 오르고 내린 힘든 등산길이었지만 삼대가 덕을 쌓아야 볼 수 있다는 설악산 일출을 보았다.

고마우신 분들 덕분에 내 인생 최고로 맛있는 라면을 먹었으니 이보다 행복한 하루가 또 있으랴 생각해본다.

멋지고 행복한 하루에 감사하고

내 인생 최고로 맛있는 라면에 감사.

728x90

'산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신안 암태도 승봉산  (0) 2023.08.30
설악산 케이블카  (0) 2022.10.18
민족의 영산 지리산 천왕봉 등산  (0) 2022.10.14
북한산 자락길 성북구 정릉구간  (0) 2022.08.19
북한산 칼바위 등산  (0) 2022.06.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