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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둘러보기 13

강화도 전등사

강화도 정족산에 있는 전등사는 고구려 소수림왕 11년(381년)에 이도화상이 창건해 현재까지 남아있는 최고의 사찰로 보물 제178호 대웅보전, 보물 제179호 약사전, 보물 제393호 중국범종, 보물 제1785호 대웅보전 목조석가여래삼존불 등 많은 문화유물을 보유하고 있다. ※ 2024년 현재 대웅보전은 보수공사 중으로 외관을 볼 수 없다 전등사는 창건 당시에는 진종사로 불리다가 고려 충렬왕의 비 정화공주가 송나라에서 대장경을 인쇄해 오고 옥으로 만든 등잔을 시주해 부처님의 말씀인 법의 등불이 전해 왔다는 의미로 1282년에 전등사로 바뀌었다. 전등사는 우리 민족의 역사와 함께 한 천년 고찰로 고려 시대에는 몽고항쟁의 근본도량이었고 1866년 병인양요 당시에는 프랑스군을 물리친 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

남한산성 행궁

남한산성 행궁 관람시간은 하절기 10 : 00 ~ 18 : 00, 동절기 10 : 00 ~ 17 : 00 이고 휴궁일은 매주 월요일이다. 관람요금은 어른(19세 ~ 64세) 2,000원, 단체 30인 1,600원 청소년(7세 ~ 18세) 1,000원, 단체 30인 800원 남한산성은 우리나라의 대표 산성으로 기록에 의하면 신라 문무왕 12년(672년)에 '주장성'이라는 기록의 옛 터에 기초하여 전해지고 있으며 조선 인조 4년(1626년)에 중앙부의 본성이 완성되어 현재까지 보수를 거듭해오면서 약 1,000년 넘게 고유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다. 국가사적 제 57호인 남한산성은 1971년 '경기도 남한산성도립공원'으로 지정되었고 2014년 6월 '탁원한 보편적 가치'를 인정받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

3.1운동 발원지 우이동 봉황각

서울시 유형문화재 제2호(1969.09.18. 지정)인 봉황각은 서울시 강북구 삼양로 173길 107-12(우이동)에 있으며 1912년에 의암 손병희 선생이 세운 것이다. 일제에 빼앗긴 국권을 되찾기 위해 천도교 지도자를 훈련시킨 곳으로 의창 수도원이라고도 부른다.봉황각은 을(乙)자형으로 앞쪽 건물은 5칸 규모로 중앙에 대청이 있고 좌우에 누마루(강선루)와 방이 배치되어 있다. 뒷쪽 건물에는 방 2칸이 있다.봉황각이라는 이름은 천도교 교조 최제우가 남긴 시에 자주 나오는 '봉황'이라는 낱말을 딴 것이고 현재 걸려있는 현판은 오세창이 쓴 것으로 '봉(鳳)'자는 당나라 명필 안진경의 서체를 '황(凰)'자는 당나라 명필 회소의 서체를 '각(閣)'자는 송나라 명필 미불의 서체를 본뜬 것이라고 한다.손병희 선생은..

북한산 문화유적 수유동 분청사기가마터

수유동 분청사기가마터는 서울특별시 강북구 삼각산로 5 (수유동 산 127-11)에 있는 조선시대의 가마터로 2014년 3월 27일 서울특별시 기념물 제 36호로 지정되었다. 수유동 분청사기가마터는 북한산 일대에 고려 말기에서 조선 초기에 이르는 시기에 운영 되었던 가마터로 2011년 학술발굴조사가 이루어져 그 중요성이 학술적으로 입증된 유적이다. 조선 초기 한양을 소비지로 하는 북한산 일대 가마의 전모를 보여주는 가마터로 상감청자에서 분청사기로 이행하는 도자기 양식과 도자기 생산의 변화 양상을 밝혀주고 있으며 이곳 이외에도 수락산 상계동 일대와 북한산 수유동과 우이동 일대 그리고 관악산 신림동과 봉천동 일대에 서울의 가마터가 분포하고 있다고 한다. 수유동 분청사기가마터는 서울특별시 강북구 수유동 산 12..

조선 왕조 제 7대 왕 세조와 정희왕후 능 광릉

광릉(光陵)은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광릉수목원로 354에 있으며 광릉수목원과 길 하나를 사이에 두고 인접해 있고 사적 제197호로 지정되어있다. 광릉은 249만 4,800㎡에 달하는 면적에 두 마리의 용이 여의주를 가지고 노는 형상이라는 쌍룡농주형(雙龍弄珠形)의 명당자리로 자리가 좋아서 세조 이후 400여 년간 그의 후손이 조선을 통치했다고 한다. 광릉 숲은 광릉이 조성되면서 왕릉의 부속림으로 일반인의 출입을 엄격하게 통제했고 일제 강점기에도 임업 시험림 구실을 한 덕분에 개발과 훼손을 피해 지금과 같은 광릉수목원으로 관리되면서 자연 생태계의 보고로 남아 있다. 세조는 조선 제4대 왕인 세종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 수양대군에 봉해졌으며 세종 이후 첫째 아들인 문종이 뒤를 이었으나 병약해 단명을 하는 바람..

조선왕조 최초 왕비 신덕왕후능 서울 정릉(貞陵)

신덕왕후능인 정릉은 서울시 성북구 아리랑로 19길 116 (정릉동)에 있으며, 운영시간은 봄(1월~5월), 가을(9월~10월) 06 : 00 ~ 18 : 00 여름(6월~8월) 06 : 00 ~ 18 : 30, 겨울(11월~1월) 06 : 30 ~ 17 : 30 이다. 우이신설 경전철 정릉역(국민대입구역) 2번 출구에서 1km 거리로 도보 15분 정도 소요된다. 조선 태조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의 능인 정릉은 2009년 6월 30일 세계유산 조선왕릉으로 등재되었고 사적 제208호로 지정되어 있다. 신덕왕후 강씨는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의 계비로 건국하기 전 고려시대 풍습에 따라 향처(고향의 부인)와 경처(개경의 부인)을 두었는데 강씨는 경처로 이성계가 수많은 전투에서 공을 세우면서도 지방토호 출신이라는..

조선왕조 제 10대 왕 연산군 묘

서울시 도봉구 방학동 산77 에 있는 연산군 묘는 다른 조선 왕릉처럼 웅장한 모습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주택가와 차도 사이 한켠에 외롭게 있으며 다른 왕릉과는 다르게 입장료를 받지 않는다.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동절기는 오후 5시)까지 무료 개방하고 매주 월요일은 휴무다. 묘 입구 정문 옆에 있는 콘테이너 박스가 묘 관리 사무실로 감독 관리자가 상주하고 있다. 역대 조선왕조 임금들의 왕릉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으나 '릉'이 아닌 '묘' 지위를 가지고 있는 연산군 묘는 세계문화유산에 포함되지 못했다. 연산군 묘는 1991년에 사적 제 362호로 지정되었으며 지정 면적은 1만 4,300 ㎡로 공식적인 명칭은 '서울 연산군 묘'라고 한다. 1506년 유배지인 강화도에서 죽은 연산군..

충신의 전형인 관우를 모신 사당 동묘(동관왕묘)

서울특별시 종로구 숭인동에 있는 서울 동묘(동관왕묘)는 중국 후한시대 촉나라 장수 관우를 모신 사당인 관왕묘로 1963년 1월에 대한민국 보물 제142호로 지정되었다. 임진왜란 때 조선 땅에서 싸우던 명나라 군사들에게 관우의 혼이 나타나 명나라 군사를 도와 군사들의 사기를 진작시켰다고해서 곳곳에 관왕묘를 건립했다고 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전란이후 민심이반을 우려한 기득권층이 중화사상에 입각한 사대주의적 통치질서를 공고히 하고자 함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전쟁이 끝난 후 명나라는 조선에 관왕묘를 지으라고 요청했고 조선은 동대문 밖에 1599년 공사를 시작해 1601년(선조 34년)에 동관왕묘를 완공했다. 명나라에서는 그 당시 황제였던 신종이 친필 현판과 함께 건축자금을 지원했다고 한다. 동관왕묘는 중..

연천 전곡리 선사유적지

연천 전곡리 유적은 세계 지질공원 안 한탄강변에 위치한 구석기 시대 유적이다. 1979년부터 발굴조사 되었으며 그해 10월 2일 유적의 중요성을 인정받아 국가 사적 제268호로 지정되었다. 전곡리 유적에서 발견된 아슐리안형 석기는 '동아시아는 찍개문화권'이라고 모비우스 교수의 학설을 결정적으로 반박하는 증거가 되었다. 1940년대 초 하버드 대학의 모비우스 교수는 세계 구석기 문화를 인도 동북부 지역을 경계로 서쪽의 아슐리안 주먹도끼 문화권과 동쪽(동아시아)의 찍개 문화권으로 구분했다. 그는 동아시아 지역에 기술적으로 발달한 주먹도끼가 없는 것은 구석기시대 동아시아 지역이 문화적으로 정체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지표이며 서양인의 인종적 우월성은 이미 구석기시대부터 결정되어 있었다는 황당한 주장을 한..

근대문화유산 창녕위궁재사

북서울 꿈의숲 공원 안에 있는 근대 문화유산인 '창녕위궁재사'는 원래 인조반정(1623년, 광해군 15년)의 공신으로 영의정을 지낸 신경진의 별장이었던 곳으로 복온공주 사후 이곳에 공주의 묘소가 정해지면서 재실로 사용되었다. 창녕위궁재사는 조선 23대 왕인 순조와 순원왕후 김씨 사이에서 둘째 딸로 태어난 복온공주와 부마(부마도위) 창녕위 김병주를 위한 재사다. 김병주와 순원왕후 김씨는 같은 안동 김씨로 집안 사람이다. 복온공주는 13세에 김병주와 혼인했는데 2년 만인 15세(1832년)에 요절했다. 현재의 창녕위궁재사 주변에 복온공주 묘를 마련했으며 복온공주 사망 21년 후 김병주도 사망해 합장했다. 부마는 공주가 사망해도 재혼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김병주는 혼자 살아서 후사가 없이 사망해 양자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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